오랜만에 셔터를 눌러봤다. 51일 만이다. 오늘 서귀포에 갈 일이 있어서 사철란이나 보려고 마이크로렌즈를 물리고 작은 천 가방에 카메라를 넣었다. 5.16도로 숲으로 갔다. 오전에 비가 내려서 인지 나뭇잎과 풀잎에 물방울이 맺혀 싱그러움이 가득했다. 자주사철란 군락지에는 아직 꽃대도 올라오지 않았다. 대신 좀딱취가 봉오리를 맺었다. 구상난풀도 고개를 들어 파란 외계인의 눈 같은 속이 보였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바위에는 사철란 하나가 봉오리 두 개만 맺었고 나머지는 꽃대도 올라오지 않았다. 먼 길 왔는데 이거라도 찍을까 하다가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어 카메라를 꺼내지 않았다.
돌아오면서 사찰의 마당과 나무를 살펴보니 여름새우난초가 꽃을 피웠지만 양지에 뜨거운 햇볕을 받아서 잎사귀 끝이 새카맣게 탔고, 지네발란이 늦둥이 꽃 한 송이를 피워 헛걸음은 면했다. 노보살님이 거처하시는 곳에 가보니 사진 작가 한 분이 나가시다 나와 마주치자 거기에 뭐가 있느냐고 하기에 여름새우난초가 꽃을 피웠을 거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분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했다. 내가 한 바퀴 돌아보니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지체하지 않고 귀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