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생의 짧은 시간이 그 앞과 뒤에 계속되는 영원 속에 '단 하루 머물렀던 길손의 추억' 처럼 흡수되어있고 내가 차지하고 있는 작은 공간, 또한 내가 바라보고 있는 이 작은 공간이 내가 알지 못하고 나를 알지 못하는 무한한 넓이를 가진 공간 속에 잠겨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나는 내가 여기에 있고 저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두렵고 놀랍다. 왜 저곳이 아니라 여기에 있는가, 왜 그때가 아닌 바로 이 때에 있는가 전혀 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여기에 두었는가? 누구의 명령과 지시에 의해서 이곳과 이때가 나에게 운명 지워져있는가? '나'란 무엇인가?
한 사람이 창가에 기대어 행인을 바라보고 있을 때 만약 내가 그곳을 지나갔다면, 그는 나를 보기 위해서 거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다. 그는 특별히 나에 관해서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누군가를 그의 아름다움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은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다. 만약 천연두가 그 사람을 죽이지 않은 채 그의 아름다움만을 앗아갔다면 그는 이미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나'는 육체 속에도 영혼 속에도 있지 않다면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또 이러한 성질은 소멸할 수 있는 것이므로 나의 본질을 형성하는 것이 아닌데 그러한 성질들 때문이 아니라면 어떻게 육체나 영혼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다른 사람의 영혼의 실체를, 그 속에 어떤 성질이 있든 상관없이 추상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렇게는 할 수 없으며 부당한 일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결코 그 사람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질만을 사랑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직이나 직책 때문에 존경받는 사람들을 경멸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그 빌려온 성질로 인하여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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