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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사색/나의 음악실

환희의 송가




베토벤의 음악은 여타의 작곡가들과는 다른 어떤 굉장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비교하기를, 모차르트는 천상의 음악을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게 한 반면

베토벤의 음악은 지상의 음악을 하늘로 올려보냈다고들 한다.

 

영화 불멸의 연인에서 9번 교향곡의 초연 중 유명한 환희의 송가를

합창할 때 어린 베토벤이 집에서 달려나가 연못에 뛰어들어 하늘을 향해 눕는

장면이 있다.

이때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이 연못에 반영되고

이어서 마치 베토벤이 우주에 떠 있는 것 같은 장면이 연출되는데

영화를 보면서 나는 환희의 송가가 별이 되고, 시가 되고, 그의 이상을

암시하는 것이라 여겼다.


1793년 본에 있을 때 베토벤은 쉴러의 시 환희의 송가를 접하고 대작의 하나를

장식하는 면류관으로 삼고자 했다고 하며 완성하기까지는 무려 31년이라는

긴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악상이 떠오를 때 그것이 기악으로 들리지 성악으로 들리지 않는다.’

라고 했던 그가 교향곡에 성악을 넣는다는 건 기술적으로도 결코 쉽지 않는

일이었지만,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언어만큼 정확한 건 없다고 인지하고

종악장에 성악을 넣어 자신의 사상과 이상을 전달하려고 했었던 건 아니었을까.

 

1820년대 빈은 로시니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경쾌한 오페라가 유행했다고 한다.

베토벤은 런던으로 이주하여 9번 교향곡을 연주하려고 했었는데

그의 애호가인 몇몇 귀족들이 조국을 떠나지 않도록 간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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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께서 새로이 한 편의 종교 음악(작품 123번의 장엄미사)을 작곡하시어

귀하의 깊은 신앙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을 거기에 표현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귀하의 위대하신 넋에 흘러드는 초자연적 빛이 그 작품을 비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 귀하의 대 교향곡들의 꽃다발에는 새로이 한 송이 불멸의

꽃이 더하여졌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지나간 몇 해 동안 귀하가 음악계에서 종적을 감추시어 귀하에게로

눈을 향하고 있던 사람들의 슬픔은 자못 컸던 것입니다.

외래의 음악이 이 땅에 뿌리를 뻗으려 들며 독일 음악의 작품들을 망각 속으로

떨어뜨리고 있는 이때, 현존하는 모든 음악가 중에서 지극히 높은 천재는

차라리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이려니 생각하고 모두 슬퍼하였던 것입니다.

비록 유행은 어떠하다 해도 우리나라는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개화와

진과 선의 새로운 군림을 오직 귀하에게서만 기대하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우리들의 기대가 실현되리라는 희망을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소서.

우리들을 위하여 또 전 세계를 위하여 올해 봄은 귀하로 인해 이중으로

꽃피는 시절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 바입니다!”

이 간원을 받고 베토벤은 깊이 감동되었다.

그는 빈에 눌러 있기로 결심하였다.


182757일에 빈에서 장엄 미사곡과 9번 교향곡이 초연되었다.

성공은 굉장하여 거의 소요가 일어나다시피 하였다.

베토벤이 무대에 나타났을 때에는 열렬한 갈채를 다섯 번이나 받았다.

예의지국인 이 나라에서는 황실의 내빈을 맞을 때라도 갈채를 세 번 밖에

하지 않는다.

경찰이 소요를 진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9교향곡은 열광적인 감격을 몰고 왔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베토벤은 연주회가 끝난 뒤에 감격한 나머지 기절을 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쉰들러의 집으로 실어갔다.

거기서 베토벤은 옷을 입은 채,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밤새도록 옅은 잠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승리도 일시적이었다.

그리고 실제적 효과는 전혀 없었다.

음악회에서 들어온 수입은 한 푼도 없었다.

물질적 곤궁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그는 가난했고 병에 시달렸고 외로웠다.

그러나 이제는 승리자였다.

사람들의 범용함을 이긴 승리자, 자기사진의 운명과 고난을 극복한 승리자였다.

 

생활의 하잘것없는 노릇을 항상 너의 예술에 희생해라!

무엇보다도 신은 높은 것이니!”(O Gott uber alles!)

 

- 베토벤의 생애, 로맹 롤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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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부터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 머리를 다쳐 신경외과에서 척추에 주사바늘을 넣어 뇌 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진액을 여러 번 뽑았고,

고교 땐 친구의 비닐하우스에 올라가 비닐을 걷다가 떨어져 엉덩방아 찐 것과

평행봉에서 회전하다가 땅으로 곤두박질해서 엉덩이로 떨어진 게

원인이었는지 모른다.

 

해를 거듭할수록 악화되어 병원에서 진료 받으니 척추가 에스자로 휘어졌다면서

수술만이 유일한 치료라고 했다.

하지만 기백만 원의 수술비가 없어서 막막한 상태로 그저 시간만 보낼 수밖에.

나중에는 걷기조차 힘들고 고통으로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

산책이라도 하면 조금 나을 수 있을까 해서 농로를 걷다가 더 이상 걸을 수 없어서

주저앉아 목 놓아 울기도 했다.

무엇보다 밤에 잠을 잘 수 없는 게 가장 큰 고통이었다.

 

이 시기에 베토벤의 교향곡을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했다.

특히 9번 교향곡은 나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친구의 LP를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서 마르고 닳도록 들으며 많이도 울었다.

1악장을 들을 때마다 고뇌와 투쟁하는 베토벤이 연상되었고

귓병과 장염으로 육체적 고통을 겪었던 그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기도 했다.

 

헤르만 헤세가 말했던 것처럼

환희의 송가는 가슴에서 분수처럼 샘솟는 기쁨이 아니라, 불행한 베토벤이 의지로서

창조한 환희이며 사람들은 오직 눈물로 그것을 딸 수 있다는 걸 알기 시작했다.

그리고 베토벤이 남긴 말

나의 음악은 고통 받는 인류를 위해서 만들었다.”

내가 힘들 때 흔들리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건

베토벤과 9번 교향곡이 나의 정신을 곧바로 서게 하는 버팀목임을 한시도 잊은 적 없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1951년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녹음한 음원은

평론가와 애호가들에게 가장 사랑받는다.

이 곡의 하이라이트인 환희의 송가 합창에서 팽팽한 긴장감과 응축된 힘은

다른 음반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네 명의 독창도 모두 훌륭하지만 실황이라서 그런지 관현악과 합창이 서로 따로 노는 듯

벙벙거리는 게 아쉽지만 그래도 디지털로 노이즈가 많이 제거되어 들을 만하다.

 

다음으로 라파엘 쿠벨릭이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과의 1982년 실황녹음인데

적절한 템포, 베토벤적인 중후함 등 표현의 과부족이 없는 표준적인 연주라고 생각된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베를린 필하모닉과 세 번이나 전집을 녹음해서

베토벤 교향곡에 대한 의지와 세계적으로 베토벤 교향곡 열풍을 일으킨 바 있는데

그 중 1977년에 녹음한 음원이 좋은 평을 받는다.

약간 빠른 템포에 뛰어난 리듬과 자신감 넘치는 당찬 연주이나 중후함과는 거리가 있는

밝고 건강하며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