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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사색/나의 음악실

슬라브적인 열정과 향수 -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 b단조

 

 

 

 

오르간 피아노와 더불어 첼로도 넓은 음역의 악기다. 오르간과 피아노 음악의 악보는 낮은음자리와 높은음자리를 병기하지만 선율 악기인 첼로는 낮은음자리와 가온음자리 그리고 높은음자리를 번갈아 가며 쓴다는 걸 보면 이를 방증하기에 충분하다. 음역이 넓다는 건 표현력이 풍부하다는 것이기도 해서 여러분야에 걸쳐 뛰어난 곡이 많고 특히 첼로 음악의 장르에서 한 획을 그은 드보르작의 b단조 협주곡은 비발디, 하이든, 슈만, 랄로, 생상스, 엘가 등의 명곡 중에서도 왕좌를 차지하는 걸작이다. 브람스가 '이 곡을 보다 일찍 들었다면 나도 첼로 협주곡을 만들었을 것이다.'며 극찬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892년부터 95년까지 3년 동안 뉴욕 국립음악원 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이른바 '아메리카 3부작'인 교향곡 9번과 현악사중주 12번 그리고 첼로 협주곡을 작곡했는데 모두 이국땅에서 고국 보히미아를 그리는 절절한 향수를 내재한 민요풍의 선율을 적절히 쓴 것이 특징이다. 내 견해로는 그 가운데 첼로 협주곡이 가장 뛰어나며 드보르작의 대표작으로 꼽고 싶다. 오케스트라와 함께 클라리넷이 연주하는 1악장의 1주제는 중후하고 느긋하게 시작하며 2주제는 민요풍으로 혼에 이어 클라리넷이 이어받는 선율이 평온하고 아름답다. 2악장은 드보르작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애잔한 선율이 시종 흘러 교향곡과 현악사중주의 2악장과 일맥상통한다. 3악장의 전주는 마치 행진곡풍의 리듬으로 시작되고 첼로는 자신감과 확신에 찬 아름다운 선율을 관현악과 주고받으며 정열적이며 힘차게 끝을 맺는다. 탄탄한 구성과 장중한 스케일, 드높은 격조, 아름다운 선율, 그리고 오케스트라에 파묻히지 않고 부각되는 첼로의 화려한 테크닉과 연주 효과 등은 슬라브적 열정과 우수를 내포한 이 곡을 독보적인 존재라 부르기에 손색없다.

 

스물여섯 살인가 일곱 살 때, 아마데우스 영화를 같이 보려던 친구 K와 칼 호텔에서 제주대 음대 이춘기 교수가 해설하는 영상 음악 감상회에 갔었다. 영국의 헨리 우드 홀에서의 실황 영상인 로스트로포비치-줄리니-런던 필의 연주로 1악장을 듣고는 전율을 느껴 눈물이 왈칵했다. 음악 감상회가 끝나고 입장할 때 받은 내 번호가 당첨되어 선물로 벽시계를 받았는데 32년이 지난 지금도 현역으로 건재하다. 또 같은 시기에 친구 M 집에 갔다가 슈타커-도라티 지휘-런던 교향악단의 연주를 듣고 홀딱 반하기도 했다. 나는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들을 때였고 친구는 태광 에로이카 '전축'을 들여놓고 LP로 듣고 있었다. 그가 사는 시장통에서 옷가게를 하는 분의 집에 가서 컴포넌트 시스템으로 LP의 음원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하여 마르고 닳도록 들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친구는 약 100장의 LP와 턴테이블을 10만 원에 내게 넘겨주고 더는 음악을 듣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들었던 슈타커의 음반은 없다.

 

첼리스트의 시금석인 이 음악은 카잘스, 로스트로포비치, 푸르니에, 슈타커, 요요 마 등의 연주자가 호평을 받는데 그중 여덟 번이나 녹음한 로스트로포비치 음반에서 6회째인 줄리니와 런던 필하모닉, 7회째인 카라얀과 베를린 필이 돋보인다. 전주가 조용히 끝나고 독주 첼로가 연주하는 1주제는 오케스트라를 덮을 정도로 힘차게 보잉 하는 첫 음을 듣는 순간 로스트로포비치가 아니면 불가하다는 걸 느꼈다. 두 음반 중 줄리니와의 협연을 좋아한다. 줄리니의 여유로운 템포와 중후하면서도 심포닉한 협연에 로스트로포비치의 첼로는 선이 굵으면서도 아름답고 유연하다. 고음질 음원(FLAC)을 다운받은 카라얀 판에 비해 윈도우 미디어 플레이어로 CD를 리핑한 줄리니 판이 부드럽고 풍부하다.